재규어 타입 01이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 힐클라임 코스를 질주하고 있다. 위장막을 두른 상태에서도 새로운 디자인 철학 '풍요로운 현대주의(Exuberant Modernism)'를 반영한 차체 비율이 드러난다. (재규어)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자동차 역사에서 브랜드를 완전히 새로 만드는 일은 신차를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실제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꿔 성공한 사례는 손에 꼽는다. 수치에 불과한 성능 이상으로 브랜드가 가진 기억과 감성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보는 소비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재규어는 2021년 JLR의 '리이매진(Reimagine)' 전략을 통해 100년 이상 축적한 헤리티지를 버리고 순수 전기차 전환을 선언했다. 이후에도 판매 부진과 수익성 악화가 이어지자 기존 브랜드 전략만으로는 경쟁력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 전면 재편에 속도를 냈다
재규어는 풀체인지 모델 출시를 중단하고 기존 모델의 상품성 개선 모델만 제한적으로 시장에 내놨다. 2024년에는 창업자 윌리엄 라이언스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아무것도 모방하지 않는다(Copy Nothing)'는 캠페인을 공개했다.
재규어를 처음부터 다시 정의하겠다는 선언 이후 첫 번째 결과물인 차세대 전기 GT '타입 01'이 지난 10일부터 13일(현지시간) 영국 웨스트서식스에서 열린 2026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에서 마침내 대중에게 공개됐다.
위장막을 쓰고 있었지만 콘셉트 공개 당시 '재규어답지 않다'는 혹평을 받았던 디자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실루엣이었다. 콘셉트가 처음 공개됐을 때와 다르지 않게 '빠르게 움직이는 냉장고', '네모난 고래' 등 악평을 받았다.
반면 실루엣에 감춰진 성능은 호평을 받았다. 우드 힐클라임을 질주한 타입 01은 기술적으로 흠잡기 어려웠다. 정숙하면서도 폭발적인 가속 성능, 코너에서도 안정적인 움직임을 이어갔다는 평가가 많았다.
타입 01은 재규어가 새롭게 개발한 전기차 전용 플랫폼 JEA(Jaguar Electric Architecture)를 기반으로 800V 전기 시스템과 실리콘카바이드(SiC) 인버터를 적용했다. 전륜 1개, 후륜 2개의 전기모터를 조합해 최고출력 1000PS(986마력), 최대토크 132.6kg·m를 발휘한다.
하지만 엄청난 출력, 정지 상태에서 시속 97km(60mph)까지 3초 이내에 도달하고 120kWh 배터리로 약 692km의 주행거리, 최대 350kW 초급속 충전도 지원이라는 압도적인 성능에도 사람들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재규어 차세대 전기 GT '타입 01'이 영국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 힐클라임 출발선에서 주행을 준비하고 있다. (재규어)
브랜드의 미래를 걸고 개발했지만 정작 사람들은 재규어가 스스로 버린 것들을 아쉬워했다. 직선 위주의 차체와 최소한의 공기흡입구로 전혀 다른 생김새를 가진 타입 01에서 재규어를 상징했던 긴 보닛과 유려한 곡선, 대형 그릴을 찾고 있었다.
재규어는 이를 '풍요로운 현대주의(Exuberant Modernism)'라는 새로운 디자인 철학으로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은 "재규어다움이 사라졌다"는 반응을 먼저 내놓고 있다.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브랜드를 버린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자동차 산업은 브랜드의 헤리티지가 곧 경쟁력이 되는 시장이다. 포르쉐가 911의 실루엣을 수십 년째 유지하는 이유,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가 변화 속에서도 브랜드의 DNA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 주목할 것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순수 전기차 전환을 선언했던 글로벌 프리미엄 브랜드 상당수가 하이브리드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 등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연기관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초고가 순수 전기차 브랜드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재규어의 승부수는 타입 01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다. 브랜드의 가장 큰 자산인 헤리티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얻은 '986마력'이라는 수치보다 '빠른 냉장고'라는 별명이 먼저 회자되고 있으니 말이다.
경쟁사들이 하이브리드와 EREV 등 현실적인 전동화 전략으로 선회하는 상황에서 재규어가 순수 전기차만으로 소비자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타입 01이 재규어가 스스로 지워버린 '재규어다움'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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