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를 돌 때마다 도시의 표정이 바뀐다. 100여 년 전 유럽을 닮은 거리와 옛 광저우의 정취가 남은 골목, 학문이 깃든 서원과 젊은 감성이 모여드는 거리. 한 도시 안에서 여러 시대를 만나는 산책이 시작된다.
과거와 현재, 그 사이에서
광저우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자 광둥성의 성도다. 화난지방 최대의 무역 도시이자 중국 개혁개방을 선도해 온 경제 도시답게 화려함으로 빛난다. 그러나 화려함을 뒤로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광저우는 또 다른 얼굴을 천천히 펼쳐 보인다.
2,200년이 넘는 역사를 품은 이 도시는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청나라 시대에는 외국과의 무역이 허락된 유일한 항구였다. 일찍이 외부에 문을 연 만큼 동서양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겹겹이 쌓여 있다. 유럽을 닮은 거리와 옛 중국의 골목, 오래된 사원과 젊은 감성이 모여드는 거리가 한 도시 안에서 어깨를 맞댄다.
‘천 씨’ 가문의 공부방, 천자츠
천자츠(陳家祠)는 1888년에 짓기 시작해 1894년에 완공된 천 씨 가문의 사당이자 서원이다. 천 씨 자제가 과거에 급제해 큰 벼슬에 오른 것을 계기로, 가문이 모여 자제들의 과거 준비 전용 서원을 세웠다.
부지 약 1만 5,000㎡에 9개의 대청과 6개의 정원, 크고 작은 19동의 건물이 회랑으로 이어져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지붕 위 색색의 도자기 인형은 살아 움직일 듯 정교하고, 목조각·석조각·벽돌조각이 더해져 건물 자체가 거대한 공예품과도 같다. 현재는 광둥민간공예박물관으로 쓰인다.
정원에 서서 회랑 너머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면, 광둥 곳곳에서 모여든 천 씨 자제들이 책을 펼쳤을 풍경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런 곳이라면 책장을 넘기는 손길도 한결 여유로웠을 듯하다.
유럽의 정취, 샤미엔다오
샤미엔다오(沙面)는 광저우 남쪽, 주장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이다. 2차 아편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조계지로 삼았다. 이후 십여 개국의 영사관과 은행, 교회가 들어섰다. 그래서 샤미엔다오는 광저우에서 가장 유럽다운 풍경을 지닌 곳이 됐다.
0.3제곱킬로미터, 축구장 약 42개 크기의 섬에는 19세기 신바로크·고딕·신고전주의 등 유럽풍 건물 150여 채가 빼곡하다. 가로수 우거진 거리를 걸으면 한 블록마다 유럽이 펼쳐지고, 한때 십여 개국의 영사관이 모여 있던 자리에는 지금도 주광저우 폴란드 총영사관이 남아 있다. 과거의 흔적이 오늘까지 이어지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민트색 외관의 스타벅스는 또 다른 명소다. 거리 곳곳에는 15위안에 사진을 찍어 주는 스냅 작가들도 자리해, 모델이 된 기분으로 샤미엔다오의 한 장면에 들어가 볼 수 있다. 웨딩 사진을 남기러 온 커플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는다. 유럽까지 가지 않아도, 샤미엔다오라면 유럽의 한 장면을 충분히 담을 수 있어서다.
오래된 것의 매력, 용칭팡
용칭팡(永慶坊)은 광저우 옛 도심의 중심부, 리완구 은녕로에 자리한 천 년의 옛 거리다. 샤미엔다오에서 걸어서 약 20분 거리. 100여 년 전, 이 일대는 광저우에서 가장 번화한 동네였고, 거상들이 모여 살며 지은 영남(嶺南) 특유의 옛 건물이 골목마다 남아 있다.
용칭팡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건 2016년이다. 광저우시는 이곳을 전국 최초의 ‘미(微, 작을 미)개조’ 시범 거리로 선정하며, 옛 건물을 전면 철거하는 대신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재생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게 살린 격자 골목 안에 카페와 소품샵이 들어섰다.
좁은 골목 어귀마다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발길을 붙잡고, 거리 한쪽으로는 잔잔한 수로와 작은 다리가 운치를 더한다. 다리 위에서는 ‘왕홍 체험’ 인파가 끊이지 않는데,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거리의 예스러움을 더 깊이 살려 낸다.
젊음이 모이는 골목, 동산커우
동산커우(東山口)는 광저우 웨슈구에 자리한 동네다. 거리 한복판에는 화교들이 광저우로 돌아오며 지은 중화민국 시기의 작은 양옥 400여 채가 들어서 있다. 중국과 서양 양식이 한데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이다.
백 년이 흐른 지금, 동산커우는 광저우에서 가장 트렌디한 동네로 통한다. 오래된 양옥에 디자이너 부티크와 카페, 갤러리가 차례로 들어섰고, 카메라를 든 Z세대로 늘 북적인다. 한국의 성수동과도 꼭 닮았다.
거리를 채우는 건 ‘힙한’ 가게들이다. 외관을 정성껏 꾸민 로컬 편집숍과 감성 카페가 골목마다 자리하고, 반소매 티셔츠 한 장이 3~4만 원 선이라 가벼운 쇼핑도 부담스럽지 않다. 어느 길은 중국 옛 거리의 결이 묻어나고, 또 어느 길은 붉은 벽돌의 양옥이 늘어선 유럽풍이다.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글‧사진 김다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