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으로 신차를 살펴보고 있는 가상 이미지. 신차의 옵션과 스펙 등을 비교해 '장바구니'에 담고 주문하는 방식이 기존 완성차 업체들을 위협하고 있다. (오토헤럴드)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화려하게 꾸며진 자동차 전시장을 직접 찾아가 영업사원의 설명을 듣고 TV와 신문 광고, 주변 입소문에 기대 신차를 고르던 시절은 지난 지 오래다.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를 검색하고 소셜미디어 리뷰를 비교하면서 클릭 몇 번으로 차를 결정하는 세상이다.
전기차 전환이 빠른 곳일수록 과거 브랜드 가치를 대변하며 충성 고객을 유지해 왔던 '헤리티지(Heritage)' 역시 고리타분한 옛이야기가 됐다. 최고출력이나 최대토크, 기어비 같은 전통적인 주행 성능 수치에도 더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마치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전제품을 고르듯 디스플레이 크기와 배터리 용량, 기본 옵션 구성을 꼼꼼히 따져 '장바구니'에 담아 비교하고 주문하는 이른바 ‘자동차 시장의 아마존화(Amazonification)’가 글로벌 신차 시장의 판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데이터 분석 전문기업 '비클 데이터 글로벌(Vehicle Data Global/VDG)'은 최근 20년간의 영국 신차 등록 데이터를 정밀 분석한 보고서에서 "전통 대중 브랜드의 급격한 몰락과 중국 신흥 브랜드의 폭발적 성장이 구매 행동 양식의 구조적 변화에서 기인했다"라고 분석했다.
포드·복스홀 점유율 급락, 전통 브랜드 지배력 붕괴
영국 자동차 시장은 포드와 복스홀, 폭스바겐 등이 사실상 지배해왔다. 그러나 이들 브랜드의 최근 시장 지배력은 붕괴 상황에 직면해 있다. 특히 2015년과 2025년 사이 10년간 영국 시장의 전통 강호들은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지난 2015년 영국 시장 부동의 1위였던 포드는 등록 대수가 64% 폭감하며 3위로 주저앉았다. 2위를 달리던 복스홀은 무려 70% 급감해 13위까지 곤두박질쳤다. 지난해 1위에 오른 폭스바겐의 성적 역시 10년 전과 비교하면 19% 줄었다. 피아트와 시트로엥의 판매는 각각 85%, 75% 급감했다.
영국 신차 시장에서 부동의 1위였던 포드는 최근 10년 새 순위가 3위로 추락했다. 사진은 영국에 있는 포드의 한 전시장이다. (오토헤럴드 DB)
상위 5대 브랜드가 장악했던 2015년 신차 시장 점유율은 43.9%에서 2025년 32.0%로 쪼그라들었다. 반면 그 빈자리를 파고든 중국계 신흥 브랜드들의 등록 대수는 최근 5년 새 10배 이상 폭증했다. 체리자동차 산하의 오모다(Omoda)와 예쿠(Jaecoo)는 영국 시장 진출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아 누적 판매 10만 대를 돌파했다.
전기차 시대, 브랜드 유산보다 ‘풀옵션’ 선호
VDG는 5대 완성차의 몰락이 전기차가 촉발한 ‘스펙 중심 소비’의 변화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브랜드 유산보다 ‘풀옵션’ 선호 VDG는 이번 변화를 단순한 브랜드 선호도 이동이 아닌 소비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으로 짚었다.
소비자들이 온라인 쇼핑몰에서 규격을 필터링하듯 자동차를 구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부품 구조가 단순해지고 디지털 기능이 전면에 부각되는 전기차(EV) 전환이 이 같은 현상을 가속화했다.
과거 소비자가 중요하게 여기던 엔진 헤리티지나 주행 질감, 브랜드의 역사적 유산은 뒷전으로 밀렸다. 대신 1회 충전 주행거리, 급속 충전 속도, 인포테인먼트 화면 크기,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 360도 어라운드 뷰 등 '검색 가능한 스펙(Searchable Features)'이 핵심 구매 기준으로 떠올랐다.
여기에 수년간 이어진 영국의 고물가 기조와 양산차 가격 인상이 맞물리며 승패가 갈렸다. 전통 완성차 업체들이 첨단 사양을 고가의 유료 옵션 패키지로 묶어 파는 동안, 중국 제조사들은 360도 카메라와 첨단 편의장비를 기본 사양으로 기본 탑재해 파격적인 가성비로 실구매층을 쓸어 담았다.
아마존의 신차 판매 서비스인 '아마존 오토스'. 클릭 몇 번으로 스펙을 비교해 장바구니에 담는 온라인 구매 방식이 글로벌 완성차 업계를 위협하고 있다. (아마존 캡처)
플랫폼과 부품 공유 생태계 역시 아마존을 빼닮았다. 겉보기에는 수많은 생소한 신규 브랜드가 쏟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지리(볼보·폴스타·로터스 등)나 체리(오모다·재쿠 등)처럼 소수의 거대 기업 그룹과 배터리 공급망, 공용 플랫폼을 기반으로 생산된다. 아마존의 수많은 제조사들이 소수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과 동일한 구조다.
소니·필립스의 교훈, OEM의 마지막 방어선은
100년 전통 OEM의 마지막 방어선 자동차 시장의 흐름은 과거 가전제품 시장의 판도 재편을 떠올리게 한다. 벤 허머(Ben Hermer) VDG 운영총괄 이사는 "포드와 복스홀이 겪고 있는 변화는 과거 소니(Sony)와 필립스(Philips) 등 전자제품 강자들이 강력한 가성비를 앞세운 신흥 브랜드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던 흐름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다만 신흥 세력의 공세가 완성차 공룡들의 완전한 패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신규 브랜드의 진입이 빠른 만큼, 아마존 마켓플레이스처럼 규모의 경제를 증명하지 못한 브랜드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위험도 크기 때문이다.
허머 이사는 "중고차 잔존가치 방어, 전국 단위의 정비망과 부품 공급망, 물류 체계 관리는 100년 넘게 영국 도로를 지탱해 온 전통 완성차 기업들이 가진 독보적인 무기"라며 "전통 레거시의 저력을 섣불리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스펙과 가격표만을 앞세운 신흥 세력의 돌풍 속에서 브랜드의 정체성과 사후관리 인프라라는 방어선을 쥔 전통 완성차들이 어떤 반격 카드를 꺼내 들지 영국 시장이 글로벌 완성차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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