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블룸버그NEF의 연례 배터리 가격 조사 보고서 및 글로벌 독립 배터리 정밀 진단 전문 기업 아빌루(AVILOO GmbH)의 데이터를 참고함. (오토헤럴드)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전기차에서 배터리는 가격과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 일반적인 전기차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가격의 비중은 약 40%에 달한다. 내연기관차에서 엔진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약 2배가량 비싸다.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보다 비싼 이유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을 이전에는 부족한 충전 인프라를 지적했지만 이제는 보조금이 줄면서 상대적으로 높아진 체감 가격이라는 점이다.
전기차 가격을 낮추려면 NCM(삼원계)이든 LFP(인산철)이든 배터리 용량을 낮추는 수밖에 없다. 배터리 팩 평균 단가를 kWh당 약 100~105달러(약 14만~15만 원/NCM 기준)라고 했을 때 80kWh를 10% 낮춰 탑재하면 최대 150만 원의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스탠다드 모델과 롱레인지 모델 간 배터리 용량 차이가 통상 15~20kWh 안팎인 현대차 아이오닉 5나 기아 EV6 등, 대부분 전기차의 트림 간 가격 차이가 약 400만~500만 원으로 책정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단순하게 구매 부담을 낮추기 위해 배터리 용량이 낮은 저렴한 트림을 선택하는 건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짧아지는 주행거리만큼 충전을 자주 해야 하고 그런 만큼 배터리 수명이 짧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소용량 배터리, 충·방전 사이클 2배... 초고속 노화
소용량 배터리가 장기 내구성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는 가장 큰 이유는 ‘충·방전 사이클(완충-완방 횟수)의 누적’이다. 배터리 셀의 물리적 수명은 주행거리 계기판의 숫자보다 몇 번 충전하고 방전했는지에 직접적으로 연동된다.
예컨대 80kWh 대용량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가 15만km를 달리는 동안 약 350~400회의 사이클을 거친다면 40kWh 안팎의 소용량 배터리 차량은 같은 거리를 달리기 위해 무려 750~800회 이상, 완충·완방 사이클을 소화해야 한다. 동일한 도로를 똑같이 달렸음에도 소용량 배터리 셀이 겪어야 하는 물리적 피로도와 화학적 노화가 2배 이상 빠르게 쌓이는 셈이다.
닛산 3세대 리프. 기본형은 52kWh의 배터리를 탑재해 북미 시장에서 3만 달러 이하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닛산)
여기에 주행과 충전 시 걸리는 부하(C-rate) 차이가 열화를 더욱 부채질한다. 동일한 100kW 모터 출력을 낼 때 80kWh 팩은 1.25C 수준의 여유로운 방전을 소화하지만 40kWh 팩은 2.5C에 달하는 고부하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방전율이 높아질수록 배터리 셀 내부 발열과 저항이 급증하고 음극 표면 손상(리튬 석출)과 전해액 분해가 빠르게 진행돼 셀 수명을 갉아먹게 된다.
# ‘소용량의 덫’ 닛산 리프 vs 대용량 아이오닉 5
이러한 공학적 메커니즘은 실험실 수치가 아닌 도로 위 대규모 실측 진단 데이터로도 명백히 입증됐다.
글로벌 배터리 진단 전문기업 아빌루(AVILOO)가 전 세계 50만 건 이상의 전기차 실측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40kWh 소용량 배터리를 탑재한 닛산 리프(ZE1)는 누적 주행거리 5만km 시점부터 배터리 잔존수명(SoH, State of Health)이 91.1%로 처지기 시작했다.
이어 15만km 시점에는 86.3%까지 급감하며 조사 대상 차종 중 최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신차 출고 당시 200km대 중반이던 실주행거리가 180km대 안팎으로 급감했다. 반면 70~80kWh급 대용량 배터리와 수랭식 열관리 시스템을 갖춘 현대차 아이오닉 5(72.6kWh)는 15만km를 달린 후에도 92.8%의 견고한 SoH를 지켜내며 글로벌 최상위권의 내구성을 과시했다.
미국 국립재생에너지연구소(NREL)와 원격 텔레매틱스 분석 기업 지오탭(Geotab) 등의 장기 추적 연구에서도 소용량 팩과 단순 냉각 구조를 가진 모델의 연간 열화율은 액체 냉각 기반 대용량 모델보다 최대 2배 이상 빠르게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명 단축과 ‘중고차 감가 폭탄’ 오히려 손해가 될 수도
배터리 열화율이 높아져 잔존용량(SoH)이 70~80% 이하로 떨어지면, 급가속 시 심각한 전압 강하가 발생하고 배터리관리시스템(BMS)이 셀 보호를 위해 급속 충전 속도를 강제로 제한한다. 차량용 동력 배터리로서의 실질적 가치를 상실하는 ‘수명 종료(EOL)’ 단계에 직면하는 것이다.
배터리 용량이 작을수록 이 한계선에 도달하는 기간이 훨씬 앞당겨질 수밖에 없다. 물론 주행거리가 극히 짧은 도심 단거리 출퇴근이나 업무용 등 개인의 운행 패턴에 따라 소용량 배터리를 장착한 엔트리 트림이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차량을 최소 5년 이상 장기 보유하거나 중고차로 되팔 계획이라면 계산기는 달라져야 한다. 배터리는 중고 전기차 잔존가치의 절반 이상을 결정짓는 핵심 고가 부품이다.
신차 구매 당시 트림 가격 400만~500만 원을 아끼기 위해 소용량 배터리를 선택했다가, 수년 뒤 주행거리 급감과 배터리 열화로 인한 중고차 감가상각 폭탄을 맞는다면 전체 총소유비용(TCO) 관점에서는 오히려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떠안게 된다.
전기차를 선택할 때 눈앞의 가격표에만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운행 패턴과 사용 목적 등에 따라서 배터리 용량이 차량 전체의 수명과 미래 잔존가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하는 이유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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