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파사트 바리안트(Volkswagen Passat Variant. 2023년형)'.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왜건으로 기록돼 있다. (폭스바겐)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길게 뻗은 루프라인의 끝을 단단하게 받쳐 든 D필러, 그리고 정차해 있는 순간에도 지면에 바짝 엎드린 듯 긴장감을 뿜어내는 실루엣. 지면과 맞닿을 듯 낮게 깔린 적재함 턱(Lip)과 평평하게 이어지는 2박스 플로어는 무거운 짐을 힘겹게 들어 올리지 않고도 가볍게 밀어 넣을 수 있는 공간 쓰임새를 자랑한다.
여기에 낮은 무게중심으로 코너를 감아 나갈 때 차체가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Rolling)이나 고속 주행 시 앞뒤로 출렁이는 피칭 현상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 조종 안정성과 승차감은 영락없는 고급 세단의 감성을 갖고 있다.
'스테이션 왜건(Station Wagon)' 이야기다. 세단의 주행 안정성과 승차감을 유지하면서 지붕 라인을 트렁크 끝까지 수평으로 연장해 적재 공간을 극대화한 이 2박스 차종은 한때 북미와 유럽 도로를 지배했던 풍요와 실용의 상징이었다.
유럽 차라는 편견, 왜건의 기원과 전성기는 북미
'포드 모델 A 스테이션 왜건(Ford Model A Station Wagon, 1929년)'. 기차역에서 화물을 운송하던 '디포 핵(Depot Hack)'에 목재 차체를 얹어 왜건의 본격적인 대중화를 연 모델이다. (포드)
흔히 왜건을 ‘유럽인들이 타는 차’로 떠올리지만 황금기를 연 진원지는 미국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대륙횡단철도가 뻗어나가던 미국에서 기차역(Station)과 교외 별장·호텔을 오가며 승객과 트렁크 짐을 실어 나르던 합승 마차 ‘디포 핵(Depot Hack)’에 모터와 바퀴를 단 것이 시초였다.
‘스테이션 왜건’이라는 이름 자체에 미국 철도 교통의 유산이 새겨져 있는 셈이다. 왜건은 1929년 포드가 목재 프레임을 덧댄 캐빈을 양산차에 올린 '모델 A 스테이션 왜건(Model A Station Wagon)'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대중화 궤도에 올랐다.
모델 A 스테이션 왜건은 차체 외벽을 목재로 마감해 ‘우디(Woody)’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당대의 부유층과 휴양지에서 고급 레저용 차량으로 통하며 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노코크 강철 바디로 거듭난 왜건은 베이비붐 세대의 '도심 탈출' 욕구와 폭발적인 아웃도어 열풍을 타고 날개를 달았다. 1950~1960년대 미국 승용차 시장에서 왜건의 점유율이 10~15%에 달해 도로 위 열 대 중 한 대 꼴을 차지했을 정도였다.
전장 5.4m가 넘는 풀사이즈 차체에 3열 역방향 시트를 갖춘 포드 컨트리 스콰이어(Country Squire), 쉐보레 카프리스 왜건은 당시 ‘아메리칸드림’을 상징하는 표준 패밀리카였다.
대륙과 브랜드마다 달랐던 왜건의 호칭
정원사나 별장 관리인의 차에서 유래한 이탈리아 고유의 왜건 명칭 '자르디네타'가 쓰인 1952년형 란치아 아우렐리아 B53(Lancia Aurelia B53 Giardinetta by Viotti). (란치아)
이처럼 광활한 북미 대륙을 누비며 정착된 ‘스테이션 왜건’은 대서양을 건너 각국의 문화적 토양에 맞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영국에서는 교외 대저택이나 사유지(Country Estate)를 드나들며 사냥 장비와 짐을 싣던 귀족 문화에서 착안해 에스테이트(Estate)라 불렀다. 독일에서는 사람과 화물 수송을 결합했다는 뜻의 '콤비나치온스크라프트바겐(Kombinationskraftwagen)'을 줄인 콤비(Kombi)로 정착했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관광과 운송(Tourismus und Transport)의 머리글자를 따 T-Modell이라는 독자적 명칭을 썼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짐을 싣는 다목적 마차에서 유래한 브레이크(Break), 정원사나 별장 관리인의 차량에서 착안한 자르디네타(Giardinetta) 등이 쓰였다. 단순히 짐차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아우디는 전진을 뜻하는 아반트(Avant), BMW는 고속 투어링 감성을 담은 투어링(Touring), 볼보는 다재다능함을 뜻하는 V(Versatility) 시리즈로 왜건을 이어왔다.
미니밴·SUV의 공습과 유럽에서의 화려한 부흥
'아우디 RS2 아반트(Audi RS2 Avant)'. 1994년 포르쉐와 공동 개발해 탄생한 모델로 고성능 슈퍼 왜건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아우디)
왜건의 전성기는 1984년 크라이슬러 보이저 등 1박스 미니밴의 등장과 포드 익스플로러로 대표되는 도심형 SUV의 급성장으로 순식간에 막을 내렸다. 미국 소비자들은 더 넓은 머리 공간과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하는 미니밴과 SUV로 대거 이동했고 왜건은 “부모 세대가 타던 지루한 구시대 차”가 됐다.
하지만 유럽의 길은 달랐다. 구도심의 좁은 골목, 비싼 유류비, 그리고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인 ‘아우토반’ 환경에서 차체가 높고 공기저항이 큰 미국식 대형 밴이나 SUV는 맞지 않았다. 시속 200km 이상의 초고속 크루징 안정성과 날카로운 핸들링을 유지하면서 주말 레저 장비를 실을 수 있는 해법은 오직 왜건뿐이었다.
여기에 부를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실용과 교양을 추구하는 유럽 중산층 및 전문직의 ‘언더스테이트먼트(Understatement)’ 문화가 맞물렸다. 폭스바겐 파사트, BMW 3·5시리즈, 아우디 A4·A6 등 독일 주력 세그먼트에서 왜건의 판매 비중은 세단을 압도해 60~70%까지 치솟았다.
유럽 제조사들은 왜건을 슈퍼카급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1994년 아우디가 포르쉐와 손잡고 선보인 ‘RS2 아반트’는 왜건도 맥라렌 F1 수준의 초반 가속을 낼 수 있음을 증명했고 이는 오늘날 V8 트윈터보를 품은 슈퍼 왜건 ‘RS6 아반트’로 이어졌다.
BMW는 완벽한 50:50 무게배분을 앞세운 3·5시리즈 투어링으로 “짐차도 칼 같은 코너링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했고 볼보는 850 왜건을 영국 투어링카 챔피언십(BTCC) 레이스에 출전시키는 파격을 선보이며 스포티한 헤리티지를 쌓아 올렸다.
크로스오버와 슈팅 브레이크로의 진화
쿠페의 날렵한 루프라인을 이식해 우아하고 역동적인 왜건의 미학을 완성하며 호평을 받은 '메르세데스-벤츠 CLS 슈팅 브레이크'. (메르세데스 벤츠)
SUV의 득세 속에서도 왜건은 스스로 형태를 바꾸며 생존력을 키웠다. 지상고가 낮아 험로 주파가 어렵다는 약점은 최저지상고를 30~65mm 높이고 차체 하부에 보호 클래딩을 두른 ‘크로스오버 왜건’으로 돌파했다. 볼보 크로스컨트리(CC), 스바루 아웃백, 아우디 올로드가 대표적이다.
‘짐차’라는 투박한 실루엣을 탈피하기 위해 쿠페의 날렵한 루프라인을 이식한 ‘슈팅 브레이크(Shooting Brake)’ 장르도 꽃을 피웠다. 메르세데스 벤츠 CLS 슈팅브레이크, 포르쉐 파나메라·타이칸 스포츠 투리스모, 제네시스 G70 슈팅브레이크 등은 D필러를 과감히 눕혀 가장 우아하고 역동적인 왜건의 미학을 완성해 냈다.
'장의차' 같아서... 끝내 외면한 한국 시장
글로벌 시장의 화려한 변천사와 달리 한국은 오랫동안 ‘왜건의 무덤’으로 불렸다. 1970년대 현대 포니 왜건부터 1990년대 아반떼 투어링과 누비라 스패건, 2010년대 현대 i40에 이르기까지 제조사들의 끊임없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왜건은 시장에 안착하지 못했다.
가장 큰 장벽은 ‘3박스 세단’에 대한 절대적 신봉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닌 신분과 성공의 상징이었고 트렁크가 불룩 튀어나온 왜건은 초기 시장 상인들의 화물차나 영구차(Hearse)를 연상시킨다는 편견을 샀다.
유럽 전략형 모델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했으나 '왜건의 무덤' 한국 시장의 벽을 넘지 못한 '현대차 i40 왜건(왼쪽)과 살룬'. (현대차)
더욱이 1990년대 말 기아 카니발, 현대 싼타페 등 세제 혜택과 저렴한 경유 가격을 등에 업은 RV와 디젤 SUV가 급부상하면서 실용성을 찾는 소비자들은 왜건을 건너뛰고 곧장 SUV로 직행했다. 여기에 동급 세단보다 100만~300만 원 이상 비싸게 책정된 신차 가격과 낮은 인기로 인한 극심한 중고차 감가상각의 악순환이 왜건의 발목을 잡았다.
전기차(EV) 시대, 다시 주목받는 왜건의 존재
SUV가 전 세계 신차 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오늘날에도 자동차 업계는 왜건의 단종 대신 새로운 신차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배경에는 ‘전동화(EV)’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자리 잡고 있다.
전기차 시대의 핵심 화두는 배터리 효율(전비)과 1회 충전 주행거리다. 전면 투영 면적이 넓고 차고가 높아 고속 주행 시 막대한 공기저항을 받는 SUV는 항속거리를 늘리기 위해 크고 무거운 배터리를 얹어야 하는 태생적 딜레마를 안고 있다.
반면 왜건은 세단의 뛰어난 공기역학 계수(Cd)를 유지하면서도 대용량 적재 공간을 그대로 제공한다. 동일한 배터리 용량으로도 SUV보다 훨씬 먼 거리를 더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는 장점도 갖고 있다.
폭스바겐 ID.7 투어러, BMW i5 투어링, 아우디 A6 e-트론 아반트, 포르쉐 타이칸 크로스 투리스모 등 글로벌 유수의 제조사들이 플래그십 전기 왜건을 잇달아 쏟아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중적인 볼륨 시장은 여전히 SUV의 몫일지 모른다. 그러나 고속 안정성과 효율, 그리고 독창적인 스타일을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운전자들에게 왜건은 대체할 수 없는 선택지다. 100년 전 기차역 짐꾼 마차로 출발했던 왜건은 이제 가장 진보한 전기차의 모습으로 도로 위에서 자신만의 확고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 오토헤럴드(http://www.autoherald.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