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페라리가 브랜드 최초 순수전기차 '루체(Luce)'를 공개한 데 이어 벤틀리도 지난 24일 첫 전기차 '토르칼(Torcal)'을 선보이면서 초호화 자동차 시장에서도 본격적인 전동화 경쟁이 시작됐다(페라리, 벤틀리)
[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페라리와 벤틀리가 100년 가까이 지켜온 내연기관의 영역을 넘어 나란히 비슷한 시기에 순수전기차 시대에 진입했다. 지난 5월 페라리가 브랜드 최초 순수전기차 '루체(Luce)'를 공개한 데 이어 벤틀리도 지난 24일 첫 전기차 '토르칼(Torcal)'을 선보이면서 초호화 자동차 시장에서도 본격적인 전동화 경쟁이 시작되는 분위기다.
두 모델은 각 브랜드 역사상 최초의 순수전기차라는 공통점을 갖지만 전기차를 해석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페라리는 전기차 전용 아키텍처를 이용해 기존 스포츠카에서 불가능했던 차체와 공간, 주행 제어 기술을 구현했고 벤틀리는 SUV라는 익숙한 형태 안에 전기 파워트레인을 넣으면서도 장인정신과 안락함, 강력하지만 여유로운 성능이라는 기존 가치를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페라리 루체에서 가장 큰 변화는 전기차가 단순히 엔진을 모터로 바꾼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페라리는 기존 내연기관을 전기차로 대체하는 방식이 아닌 멀티 에너지 전략의 새로운 선택지로 루체를 개발했고 전기모터부터 배터리까지 핵심 부품을 마라넬로에서 직접 설계·개발·생산한다. 루체 개발 과정에서 새롭게 출원한 특허만 60건 이상이다.
전동화가 만들어낸 변화는 차체부터 드러난다. 루체는 페라리 역사상 최초의 5인승이자 두 번째 4도어 모델로, 기존 프런트 미드십 엔진과 리어 기어박스를 연결했던 트랜스액슬 구조를 벗어나면서 이전 페라리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실내 공간을 확보했다.
두 모델은 각 브랜드 역사상 최초의 순수전기차라는 공통점을 갖지만 전기차를 해석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페라리, 벤틀리)
디자인 역시 기존 페라리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조나단 아이브와 마크 뉴슨이 이끄는 러브프롬이 프로젝트 초기부터 참여해 페라리 디자인센터와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만들었고, 매끄러운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글라스 하우스와 차체에서 떠 있는 듯한 전후면 공기역학 윙을 적용했다. 전륜 23인치·후륜 24인치 휠 역시 페라리 양산 로드카 가운데 가장 큰 크기다.
반대로 벤틀리는 첫 전기차에서도 자신들이 잘해온 것을 버리지 않았다. 토르칼은 '컨티넨탈 GT'와 '플라잉스퍼', '벤테이가'에 이은 브랜드 네 번째 모델이자 최초의 순수전기차로 개발됐으며 낮고 매끄러운 도심형 럭셔리 SUV라는 새로운 형태 안에 벤틀리의 전통적인 디자인 요소를 담았다.
토르칼의 긴 휠베이스와 짧은 오버행, 직각으로 세운 전면부는 벤틀리가 '수직적 우아함(Upright Elegance)'이라고 부르는 비례를 구현한다. 여기에 길게 뻗은 보닛과 일루미네이티드 다이아몬드 그릴, 강하게 부풀린 리어 펜더를 조합해 전기차에서도 기존 벤틀리를 연상할 수 있는 형태를 유지했다.
페라리와 벤틀리는 실내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두 브랜드의 차이가 드러난다(페라리, 벤틀리)
실내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두 브랜드의 차이가 드러난다. 루체는 기계식 버튼과 다이얼, 토글 스위치를 삼성디스플레이와 함께 개발한 디지털 디스플레이와 결합했다. 전기차라고 모든 기능을 화면 안에 집어넣는 대신 운전자가 직접 만지고 조작하는 촉각적 경험을 남겨두는 방식이다.
토르칼 역시 센터 콘솔과 스티어링 휠에 주요 기능을 위한 물리 버튼을 유지했지만 강조점은 조금 다르다. 가죽과 울, 베니어, 알루미늄의 질감을 살리고 널링 처리된 조작장치와 불스아이 송풍구를 배치해 전기차에서도 기존 벤틀리 실내에서 느껴졌던 소재와 장인정신을 이어가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성능으로 넘어가면 페라리의 방향은 더욱 분명해진다. 루체는 네 바퀴에 각각 전기모터를 배치한 4모터 시스템으로 합산 최고출력 1050cv를 발휘하고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2.5초, 200km까지 6.8초 만에 도달한다. 최고속도는 310km/h 이상이며 공차중량은 2260kg이다.
각 바퀴를 독립적으로 제어한다는 점은 루체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술이다. 구동과 회생제동, 조향각, 수직 운동을 개별적으로 제어하고 'F80'에서 가져온 액티브 서스펜션과 독립 후륜 조향을 조합했다.
벤틀리 토르칼은 절대적인 숫자에서는 루체보다 한발 물러서지만 결코 느린 전기 SUV가 아니다(페라리, 벤틀리)
벤틀리 토르칼은 절대적인 숫자에서는 루체보다 한발 물러서지만 결코 느린 전기 SUV가 아니다. 앞뒤 두 개의 영구자석 동기식 모터를 이용해 최고출력 888PS와 벤틀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최대토크 1350Nm(137.7kg·m)를 발휘하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2.9초 만에 가속한다.
벤틀리는 여기에서 숫자보다 차체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더 많은 기술을 투입했다. 브랜드 최초 풀 액티브 서스펜션과 어댑티브 2밸브 댐퍼를 적용하고 별도의 안티롤 바 없이 댐퍼 자체가 안티롤 토크를 능동적으로 제어한다. 전자식 올 휠 스티어링도 기본으로 적용해 뒷바퀴를 최대 5도까지 조향하며 회전반경은 11.1m로 줄였다.
배터리와 충전에서는 두 차의 또 다른 차이가 나타난다. 루체는 122kWh 배터리와 800V 시스템을 적용해 1회 충전 530km 이상의 주행거리를 목표로 하며 최대 350kW 급속충전을 지원한다.
토르칼은 113kWh 배터리를 사용하면서 WLTP 기준 최대 600km를 달린다. 최대 충전출력도 400kW로 루체보다 높아 배터리 잔량 10%에서 80%까지 16분 만에 충전할 수 있으며 7분 충전으로 약 160km의 주행거리를 확보한다.
전기차에서 사라진 엔진 사운드를 대체하는 방법은 두 브랜드의 철학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페라리, 벤틀리)
따라서 숫자만 비교하면 두 모델의 목표가 확실하게 갈린다. 루체는 토르칼보다 큰 122kWh 배터리를 사용하면서 주행거리는 530km 이상이지만 1050cv와 2.5초의 가속성능, 네 개의 모터를 이용한 개별 휠 제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반대로 토르칼은 최고출력을 888PS로 낮추면서 최대 600km의 주행거리와 400kW 충전 성능을 확보해 장거리 GT와 럭셔리 SUV의 성격을 강조했다.
사라진 엔진 사운드를 대체하는 방법은 두 브랜드의 철학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페라리는 기존 엔진음을 인위적으로 복제하지 않고 구동계에서 실제 발생하는 진동을 액슬 중앙의 가속도계로 포착한 뒤 이를 필터링하고 증폭해 운전자에게 전달한다. 전자 기타가 진동을 전기신호로 바꾸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전기 파워트레인 자체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새로운 페라리 사운드로 만들었다.
벤틀리는 헤리티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끌어올리면서 토르칼에는 과거 6¾리터 V8 엔진에서 영감을 받은 '벤틀리 다이내믹 심포니'를 적용했다. 실제 악기 연주를 활용해 벤틀리 고유의 사운드 감성을 전기차에 구현하는 방식이다. 같은 엔진 없는 전기차지만 페라리는 전기모터의 실제 기계적 움직임에서 새로운 소리를 찾고, 벤틀리는 과거 V8이 남긴 감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한 셈이다.
두 모델을 놓고 보면 초호화 브랜드의 첫 전기차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확인된다(페라리, 벤틀리)
두 모델을 놓고 보면 초호화 브랜드의 첫 전기차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페라리는 전동화를 기존 페라리의 제약을 없애는 기술로 활용했다. 4모터와 5인승, 새로운 차체 비례와 외부 디자인 협업까지 받아들이면서 전기차이기 때문에 가능한 새로운 페라리를 만들겠다는 접근이다.
반대로 벤틀리는 토르칼을 순수전기차지만 긴 보닛과 강한 리어 펜더, 천연 소재와 물리 버튼, 여유로운 장거리 주행과 브랜드 고유의 사운드까지 기존 고객이 벤틀리에서 기대했던 경험을 가능한 한 이어간다. 벤틀리 역시 토르칼을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를 없애기 위한 대체재가 아니라 고객에게 선택지를 더하는 모델로 규정하고 있다.
루체와 토르칼의 차이는 숫자보다 전기차 시대에 각 브랜드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 것인지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페라리, 벤틀리)
결국 루체와 토르칼의 차이는 1050cv와 888PS, 2.5초와 2.9초, 530km와 600km라는 숫자보다 전기차 시대에 각 브랜드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 것인지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페라리가 전동화를 이용해 지금까지 없었던 페라리를 만드는 쪽을 택했다면 벤틀리는 새로운 동력원 안에서도 지난 107년간 쌓아온 벤틀리의 경험을 이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김훈기 기자/hoon14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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