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면 슬라이딩 도어를 활짝 열고 있는 미니밴. 세단이나 SUV는 흉내 낼 수 없는 극강의 공간 효율과 승하차 편의성으로 패밀리카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 (오토헤럴드 DB)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문턱이 낮은 플로어 위로 차체 측면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며 열리는 슬라이딩 도어, 탑승자가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2열과 3열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실내 워크스루(Walk-through) 공간.
높은 시야와 널찍한 대시보드가 안겨주는 탁 트인 개방감에 점차 진화하면서시트를 접거나 바닥 아래로 완전히 숨기면(스토우 앤 고) 성인 자전거 여러 대와 캠핑 장비가 통째로 들어가는 마법 같은 공간 쓰임새를 자랑한다.
어디 이뿐인가. 세단 수준의 전륜구동 모노코크 승차감에 광활한 실내를 더해 대가족도 안락하게 이동할 수 있는 거주성까지 품었다. 1980년대 초반 등장해 글로벌 패밀리카 시장을 평정한 다목적 승용차(MPV, Multi-Purpose Vehicle), 바로 미니밴 이야기다.
SUV의 거센 파고에 부침을 겪기도 했던 미니밴은 최근 첨단 전동화 기술과 초호화 쇼퍼드리븐 라운지를 결합한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며 제2의 전성기를 열고 있다.
파산 직전 크라이슬러를 살려낸 '플리머스 보이저'
1984년 등장해 전 세계 미니밴의 표준을 세운 '플리머스 보이저(Plymouth Voyager)'와 '리 아이아코카' 크라이슬러 회장. 전륜구동 승용 플랫폼에 슬라이딩 도어를 더해 북미 패밀리카 지형을 완전히 뒤바꿨다. (오토헤럴드 DB)
미니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 등장한 폭스바겐의 전설적인 ‘마이크로버스(타입 2)’나 1930년대 스카라브(Scarab) 같은 원박스 형태의 선구적 모델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승용 미니밴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것은 1984년이다.
당시 파산 직전의 위기에 몰렸던 크라이슬러의 구원투수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 회장은 승용 K-카 플랫폼을 바탕으로 전륜구동 미니밴 ‘플리머스 보이저(Plymouth Voyager)’와 ‘닷지 캐러밴(Dodge Caravan)’을 전격 출시했다.
당시 미국 가정의 표준이던 풀사이즈 왜건은 차체가 너무 길어 주차가 힘들었다. 또 트럭 기반의 대형 밴은 승차감이 거칠고 차고가 높아 일반 차고에 들어가지 못했다. 리 아이아코카는 왜건과 트럭 밴의 단점을 덜어내고 승용 감각의 안락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차종에 주목했다.
이를 위해 크라이슬러는 승용차 특유의 부드러운 승차감과 전륜구동이 선사하는 평평한 실내 바닥, 일반 차고에 쏙 들어가는 전고, 그리고 비좁은 주차 공간에서도 아이들이 안전하게 승하차할 수 있는 ‘측면 슬라이딩 도어’를 절묘하게 조합해 냈다. 대가족이 함께 편안하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패밀리 미니밴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출시 첫해부터 쏟아지는 주문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이 미니밴 듀오는 파산 벼랑 끝에 섰던 크라이슬러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일등 공신이 됐고 리 아이아코카는 '경영의 귀재'이자 미국 자동차 역사의 전설적인 인물이 됐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는 르노가 마트라(Matra)와 손잡고 고속철도 테제베(TGV)를 연상시키는 날렵한 원박스 유선형 바디에 1열 시트가 뒤로 180도 회전하는 모듈형 인테리어를 적용한 ‘에스파스(Espace)’를 출시해 ‘모노스페이스(Monospace)’ MPV 붐을 일으켰다.
북미를 지배한 '사커맘'의 상징, 그리고 SUV에 내준 왕좌
유럽식 미니밴의 효시로 꼽히는 1984년형 '르노 에스파스(Renault Espace)'. 원박스 유선형 디자인과 모듈형 시트 구조로 유럽 패밀리카 시장에 큰 충격을 던졌다. (오토헤럴드 DB)
미니밴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북미 중산층 가정의 독보적인 상징이었다. 방과 후 아이들을 태우고 축구 연습장과 마트를 쉼 없이 오가던 열성적인 교외 어머니들을 일컫는 ‘사커 맘(Soccer Mom)’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고 미니밴을 타지 않으면 교외 중산층 가족의 대화에 낄 수 없을 정도였다.
포드 윈드스타, 쉐보레 아스트로에 이어 북미 전용으로 덩치를 키운 혼다 오딧세이와 토요타 시에나까지 가세하면서 미니밴 시장은 연간 100만 대가 훌쩍 넘는 거대한 격전지로 성장했다. 3열 시트가 트렁크 바닥 아래로 완전히 접혀 들어가는 혁신적인 싱킹(폴딩) 기능과 천장 접이식 모니터 등 가족 중심의 첨단 편의 사양들 역시 미니밴을 통해 자동차 역사상 최초로 대중화됐다.
그러나 지나친 실용성은 역설적으로 미니밴의 발목을 잡았다. 2000년대 들어 자녀들이 성장하고 디자인과 개성을 중시하는 소비 성향이 부각되자, 미니밴에는 “부모 세대가 억지로 타는 지루하고 투박한 차”, “패션 감각을 포기한 차”라는 부정적 낙인이 찍히기 시작했다.
트렌드에 민감해진 소비자들은 세련된 외관과 당당한 차체를 뽐내는 도심형 3열 SUV로 빠르게 눈을 돌렸다. 한때 수십 종에 달하며 도로를 가득 메웠던 북미 미니밴 시장은 오늘날 크라이슬러 퍼시피카, 혼다 오딧세이, 토요타 시에나, 그리고 기아 카니발 등 극소수 모델만이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는 틈새 세그먼트로 축소됐다.
IMF 위기 뚫어낸 '카니발 신화'... 국민 아빠차로 우뚝
1998년 외환위기(IMF)의 늪에 빠져 있던 기아를 구해낸 1세대 '카니발(Carnival)'. 9인승 승합 혜택과 다목적 공간성으로 한국형 미니밴의 독점적 역사를 열었다. (오토헤럴드 DB)
북미에서 미니밴의 입지가 줄어드는 동안, 한국 시장에서 미니밴은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리며 독보적인 베스트셀러로 성장했다. 그 중심에는 1980년대 '봉고 신화'를 썼던 기아가 법정관리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1998년 1월 구원투수로 등판시킨 ‘카니발(Carnival)’이 있었다.
1997년 부도 유예 협약과 법정관리 신청에 이어 국가적 외환위기(IMF) 한파까지 겹치며 벼랑 끝에 몰렸던 기아를 기적처럼 다시 일으켜 세운 주역이 바로 1세대 카니발이다.
보닛이 돌출된 세미보닛(1.5박스) 승용 설계로 캡오버형 승합차의 충돌 취약성을 극복한 카니발은 탁월한 안전성에 더해 저렴한 연료비(디젤·LPG), 9인승 승합차 세제 혜택, 그리고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 진입 혜택이라는 '3박자'를 등에 업고 단숨에 국민 패밀리카로 떠올랐다.
카니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현대차 트라제 XG(1999년), 쌍용차 로디우스(2004년) 등이 잇달아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카니발의 견고한 아성을 넘지 못하고 차례로 무대 뒤로 사라졌다.
이후 세대를 거듭하며 진화한 카니발은 투박한 승합차 이미지를 완전히 벗겨냈다. 대형 럭셔리 세단 못지않은 세련된 디자인과 2열 프리미엄 릴렉션 컴포트 시트,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더하며 대가족 패밀리카는 물론 연예인과 기업인들의 비즈니스 의전차 시장까지 완벽히 장악했다.
SUV가 승용차 시장 전체를 장악한 한국에서도 카니발만큼은 매월 국산차 판매 최상위권을 굳건히 지키며 대체 불가능한 독점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전동화와 럭셔리의 결합, '달리는 퍼스트클래스'로의 귀환
토요타의 플래그십 럭셔리 미니밴 '알파드(Alphard)'의 실내. 뒷좌석 VIP 의전 기능을 극대화해 아시아 프리미엄 쇼퍼드리븐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오토헤럴드 DB)
SUV의 공세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든 줄 알았던 미니밴은 최근 전기차(EV) 전환과 하이엔드 럭셔리 트렌드를 타고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특히 거대한 내수 시장을 지닌 아시아를 중심으로 미니밴은 전통적인 3박스 플래그십 세단의 영역까지 넘보는 ‘움직이는 VIP 라운지’로 재정의되는 중이다.
토요타 알파드와 렉서스 LM은 비행기 일등석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독립식 오토만 시트와 대형 파티션 디스플레이를 앞세워 아시아 신흥 부유층과 의전 시장을 사로잡으며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유럽 제조사들까지 1회 충전 700km 이상을 달리는 초호화 순수 전기 MPV를 잇달아 쏟아내며 판을 뒤흔들고 있다.
평평하고 광활한 실내를 확보할 수 있는 스케이트보드 전기차 플랫폼은 미니밴의 공간성을 극대화하기에 가장 완벽한 뼈대다. 공기저항을 획기적으로 낮춘 미래지향적 유선형 디자인과 첨단 자율주행 기술이 결합되면서, 미니밴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달리는 집무실’이자 ‘온전한 휴식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1984년 가족의 편안한 일상을 위해 탄생해 왜건을 무너뜨렸고, SUV의 거센 도전을 견뎌내며 이제는 최고급 미래 모빌리티의 주역으로 우뚝 선 미니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 패밀리카'의 족보는 지금, 가장 눈부시고 화려한 형태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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