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백의 원조 '르노 4'. 짧은 리어 오버행과 지붕부터 수직으로 뚝 떨어지는 테일게이트. 컴팩트한 차체에도 광활한 적재 공간과 날렵한 핸들링으로 유럽 대륙을 평정했다. (오토헤럴드 DB)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뒷유리창과 트렁크 도어를 한 몸으로 묶어 지붕 끝까지 시원하게 열리고 뒷바퀴 바로 뒤에서 군더더기 없이 칼로 베어낸 듯 뚝 떨어지는 짧은 리어 오버행으로 좀처럼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은 악동이 그려진다.
세단처럼 돌출된 트렁크 덱(Deck)을 과감히 잘라내 전장이 극도로 짧아졌지만 테일게이트를 위로 들어 올리고 2열 시트를 접어 넘기면 대형 가전제품이나 자전거까지 꿀꺽 삼키는 반전의 공간 쓰임새를 자랑한다.
여기에 짧은 휠베이스와 가벼운 공차중량이 선사하는 칼 같은 조향 반응, 그리고 좁은 골목길과 회전교차로를 면도날처럼 파고드는 경쾌한 거동은 대형 SUV나 긴 세단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짜릿한 손맛을 느끼게 해준다
잠수함 해치처럼 트렁크 문을 위로 들어 올리는 2박스 컴팩트 승용차 '해치백(Hatchback)' 이야기다. 해치백은 1970년대 글로벌 오일쇼크의 파고 속에서 실용성과 경제성을 무기로 전 세계 소형차의 표준이 됐다. 유럽 대륙을 평정한 뒤 고성능 '핫해치(Hot Hatch)'로 진화했고 오늘날 전기차 시대의 핵심 크로스오버(CUV) 형태로 그 유전자를 이어가고 있다.
1974년 골프의 등장, 오일쇼크가 낳은 '해치백의 교과서'
1974년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직선 디자인과 전륜구동 패키징으로 등장해 글로벌 소형차의 패러다임을 바꾼 1세대 '폭스바겐 골프(Golf)'. (폭스바겐)
해치백의 구조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1년 르노 4(Renault 4)나 1965년 르노 16처럼 뒷문을 위로 들어 올리도록 만든 초기 모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 '현대적 해치백'이라는 완벽한 공식을 확립한 주인공은 1974년 등장한 폭스바겐 1세대 ‘골프(Golf)’다.
1973년 터진 제1차 석유파동(오일쇼크)으로 기름값이 폭등하자 무겁고 기름을 많이 먹던 후륜구동 대형차들은 순식간에 외면받았다. 경영 위기에 빠진 폭스바겐은 전설적인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에게 디자인을 맡겼다. 주지아로는 그 즉시 낡은 공랭식 비틀의 후륜구동(RR) 레이아웃을 완전히 걷어 내 버린다.
대신 가로배치 엔진과 전륜구동(FF), 그리고 차체 후면을 직각으로 잘라낸 '2박스 스퀘어 디자인'을 결합했다. 차체 길이는 3.7m에 불과했지만 성인 4명이 넉넉히 타고 트렁크를 천장까지 쓸 수 있는 공간 혁명이 일어났다.
골프는 출시와 동시에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며 누적 3700만 대 이상 팔려 나갔다. 그리고 출시 이후 지금까지 '해치백의 영원한 기준'이자 교과서로 불리고 있다.
'양의 탈을 쓴 늑대'... 고성능 핫해치의 탄생
소형 짐차에 불과했던 해치백에 고성능 엔진과 탄탄한 섀시를 얹어 슈퍼카 사냥꾼으로 군림한 1976년형 '폭스바겐 골프 GTI'. (폭스바겐)
유럽인들에게 해치백은 단순한 출퇴근용 또는 가성비나 경제성만 따지는 차가 아니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중세풍 골목길과 와인딩 로드가 즐비한 유럽 도로 환경에서 가볍고 꽁무니가 짧은 해치백은 최고의 드라이빙 머신이 될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이 잠재력을 폭발시킨 모델이 바로 1976년 탄생한 ‘골프 GTI’다. 소형 해치백에 고출력 연료분사 엔진과 단단한 스포츠 서스펜션을 조합한 골프 GTI는 아우토반 1차로에서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스포츠카들을 위협하며 ‘핫해치(Hot Hatch)’라는 전설적인 서브 장르를 열었다.
이후 푸조 205 GTi, 르노 클리오 RS, 포드 포커스 RS, 혼다 시빅 타입 R 등 유럽과 일본 브랜드들이 자존심을 건 핫해치 전쟁을 벌였다. 가볍고 탄탄한 차체 덕분에 서킷과 와인딩 로드에서 고가의 후륜 스포츠카를 제압하는 핫해치는 유럽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한 대중적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짐차 혹은 꽁지 잘린 차' ...한국에서는 푸대접
현대차 최초의 독자 모델이자 해치백 스타일을 품었던 1975년형 '포니(Pony)'. (현대차)
글로벌 시장의 뜨거운 열기는 한국 자동차 역사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한국은 왜건과 함께 해치백의 무덤으로 불린다.
출발은 화려했다. 1975년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 생산 모델인 현대 ‘포니’가 바로 패스트백, 해치백 스타일이었다. 1987년 기아 ‘프라이드’ 역시 뛰어난 경제성과 잔고장 없는 내구성으로 마이카 붐을 주도하며 국민차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국민 소득이 늘어나자 한국 소비자들의 시선은 급격히 보수적인 3박스 세단으로 쏠렸다. 한국 사회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성공과 체면을 상징하는 과시재였다. 트렁크가 튀어나오지 않은 해치백은 “뒤가 잘려 나가 없어 보이는 차”, “사고 나면 뒤에서 크게 다치는 위험한 차”라는 편견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현대차 베르나 센스, 라비타, i30, 벨로스터, 르노 클리오 등 빼어난 주행 완성도를 갖춘 수많은 명작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매번 쓴잔을 마셨다. 해치백을 고를 바에는 공간이 더 넓은 도심형 소형 SUV나 대중적인 아반떼로 선택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70년 중후반에서 80년대 말까지 그나마 팔렸던 해치백 대부분은 이후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폭스바겐 골프'만이 수입차 시장에서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성공했을 뿐, 국산 해치백은 사실상 라인업 자체가 멸종되고 말았다.
전기차 시대, CUV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부활
1세대 포니 해치백의 헤리티지를 계승해 탄생한 현대차의 전용 전기차 '아이오닉 5'. 해치백 특유의 실루엣을 크로스오버(CUV)로 재해석했다. (현대차)
엔진 시대의 종말과 함께 국내외에서 사라져 가는 듯했던 해치백의 형태는 최근 전동화(EV) 시대를 맞아 가장 화려한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은 배터리를 바닥에 깔고 보닛 안의 엔진을 없애 실내를 넓히는 데 최적화돼 있다. 이 구조에 가장 이상적인 차체 실루엣이 바로 군더더기 없는 해치백 형태의 2박스 구조다.
현대차가 E-GMP 플랫폼을 처음 적용한 ‘아이오닉 5’가 1975년 포니 해치백의 각진 실루엣과 리어 테일게이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제조사들은 둔탁하고 거대한 정통 SUV 대신, 지상고를 살짝 높이고 휠베이스를 극대화한 ‘크로스오버 유틸리티 비히클(CUV)’이라는 이름으로 해치백의 공간 마법을 계승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폭스바겐 ID.3, 르노 5 E-Tech, 푸조 e-208 등이 콤팩트 전기 해치백이 도심형 전기차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의 절망 속에서 실용주의의 깃발을 들고 태어난 차. 가장 컴팩트한 차체로 가장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날렵한 기동력으로 골목길의 영웅이 되었던 해치백은 이제 전기차의 날개를 달고 미래 모빌리티의 핵심 형태로 다시 부활하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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