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슈테펜 발리저(Frank-Steffen Walliser) 벤틀리 회장 겸 CEO. (오토헤럴드 DB)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순수 전기차(BEV) 시대가 도래하면서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들은 전례 없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강력한 모터 출력과 번개 같은 가속 성능은 이제 대중적인 전기차에서도 손쉽게 구현할 수 있는 영역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진의 고유한 박동과 배기음이 사라진 정숙한 공간에서 ‘럭셔리 고유의 차별화된 영혼’을 어떻게 구현하고 증명할 것인지에 해석과 기술적 차이는 다르다.
벤틀리가 브랜드 최초의 순수 전기 도심형 럭셔리 SUV ‘토르칼(Torcal)’을 통해 내놓은 해답은 명확했다. 바로 ‘빛(조명)’과 ‘소리(사운드)’를 통한 감각의 연결이다.
지난 15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데뷔 무대에서 프랑크-슈테펜 발리저(Frank-Steffen Walliser) 벤틀리모터스 회장 겸 CEO를 비롯한 핵심 경영진은 토르칼의 개발 본질을 설명하며 조명과 사운드 시스템에 녹아든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실제 악기와 장인의 망치질로 빚은 ‘다이내믹 심포니’
벤틀리 토르칼의 사운드는 합성 사운드 대신 실제 사람이 직접 연주해 창조해 낸 것들이다. (오토헤럴드 DB)
많은 완성차 제조사들이 전기차 특유의 적막감을 해소하기 위해 컴퓨터 합성 전자음을 입히는 방식을 택한다. 현대차의 경우 고성능 내연기관차의 엔진과 변속 타이밍에 맞춘 기계적 사운드를 전기차에 이식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벤틀리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소리를 창조했다.
발리저 CEO는 “1919년 창립 이래 강력한 내연기관 엔진이 만들어내는 박동감은 언제나 벤틀리 역사의 핵심이었다”라면서도 “토르칼 개발 과정에서 단순히 전자적 모방으로 엔진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밝혔다. 대신 탄생한 것이 바로 ‘벤틀리 다이내믹 심포니’다.
벤틀리는 6¾L V8 엔진의 본질적인 매력이 ‘리듬’에 있다는 점을 포착하고 전문 음악가들과 손을 잡았다. 합성 사운드 대신 실제 사람이 직접 연주한 드럼, 비올라, 베이스 기타의 미세한 변주와 작은 불완전성까지 소리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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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링 시의 잔잔한 고동부터 풀 가속 시의 묵직한 중저주파까지, 차량의 토크 및 속도와 유기적으로 연동되며 운전자에게 자연스러운 청각적 피드백을 전달한다.
청각적 경험의 디테일은 기능음에서도 빛을 발한다. 방향지시등 소리는 벤틀리 크루 공방의 장인이 가죽 표면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를 실측 녹음해 구현했고 음성 어시스턴트 알림음은 크리스털 와인잔 테두리를 문지르는 고주파 마찰음을 채택했다.
크리스토프 조르주(Christophe Georges) 마케팅·세일즈 총괄은 “토르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단 하나의 기능을 꼽으라면 단연 ‘다이내믹 심포니’다. 이는 한마디로 찬란하고 눈부신(Glorious) 사운드”라며 “럭셔리카는 감성으로 사는 것인데 벤틀리는 청각을 포함한 탑승자의 오감(All Senses)을 완벽히 사로잡는다”고 설명했다.
‘빛의 예술’, 핸드컷 크리스털 굴절을 그래픽으로
토르칼 전면부 그릴에는 ‘일루미네이티드 다이아몬드 그릴’이 적용됐다. (오토헤럴드 DB)
전면 라디에이터 그릴은 벤틀리뿐만 아니라 모든 브랜드의 역사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가장 상징적인 그래픽이다. 그러나 엔진 냉각용 공기 흡입구가 필요 없는 순수 전기차에서 그릴의 존재 가치는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로빈 페이지(Robin Page) 디자인 총괄은 “냉각용 공기가 필요 없다는 이유로 그릴을 지우는 대신, 빛을 매개로 한 하나의 조각 예술품으로 재탄생시켰다”고 강조했다.
토르칼의 전면부에는 서로 다른 크기의 다이아몬드 패턴이 조명으로 떠오르는 ‘일루미네이티드 다이아몬드 그릴’이 적용됐다. 블랙 배경 위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다이아몬드 조명은 야간 주행 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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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빛의 언어’는 실내 디지털 그래픽으로도 이어진다. 화면 속 디지털 요소를 평범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채우지 않고 영국의 유서 깊은 핸드컷 유리 공방인 ‘컴브리아 크리스털(Cumbria Crystal)’과 협업했다.
장인이 직접 깎은 크리스털 잔에 조명을 비췄을 때 나타나는 불규칙하고 유기적인 빛의 굴절과 움직임을 고해상도 영상으로 캡처해 계기판 및 디스플레이 그래픽으로 구현한 것이다.
실내 앰비언트 라이팅 또한 단순한 간접조명에 머물지 않는다. 도어와 대시보드 하부를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무빙 라이트는 탑승객을 포근하게 감싸는 ‘누에고치 같은 안식처(Cocooning Haven)’를 연출한다.
4개의 익스피리언스 모드로 미쉐린급 맞춤 여정
토르칼은 주행 모드와 탑승객 취향에 맞춰 각각 다른 조명과 사운드를 설정할 수 있다. (오토헤럴드 DB)
더 주목해야 할 점은 토르칼의 조명과 사운드는 차량의 주행 모드와 맞물려 완성형 감성 공간을 창출한다는 사실이다. 토르칼에 탑재된 네 가지 ‘익스피리언스 모드(Experience Mode)’는 조명, 사운드, 공조, 그래픽을 통합 조율한다.
벤틀리 모드는 순백의 화이트 앰비언트 라이트와 완벽히 균형 잡힌 사운드로 가장 벤틀리다운 정제된 럭셔리를 선사하고 스포츠 모드에서는 인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블루 앰비언트 라이트, 수평으로 전환되는 역동적 그래픽, 그리고 한층 웅장해진 다이나믹 심포니의 볼륨이 결합해 888마력의 폭발적인 질주 본능을 자극한다.
따뜻한 벽난로와 일출을 연상시키는 오렌지 조명과 함께 정보 표시를 최소화하는 ‘디지털 디톡스’를 구현하는 컴포트 모드, 실내 온도를 살짝 낮추고 외기 순환을 늘리는 한편, 은은한 그린 조명과 자연에서 채취한 맑은 새소리를 결합해 피로를 풀어주는 리프레시 모드까지 토르칼의 공간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게 하는 감성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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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저 CEO는 “요즘 4자리 수 마력을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차에 고유한 ‘캐릭터’를 불어넣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라며 “토르칼은 단순히 전기 파워트레인을 탑재한 차가 아니라 벤틀리의 헤리티지와 장인정신, 그리고 인간적 감성을 최첨단 빛과 소리로 조화시킨 ‘가장 벤틀리다운 자동차’”라고 역설했다.
조명과 사운드라는 가장 아날로그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매개체를 통해 디지털 전동화 시대를 재해석한 토르칼. 벤틀리가 제시한 이 새로운 럭셔리의 공식이 차세대 럭셔리 EV 시장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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