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소개하는 영상에서 발견된 현대차 스타렉스 구급차. 앞 번호판의 숫자 '60'은 북한 교통 규정상 ‘의료·보건 부문’ 관용차에 공식 부여되는 고유 부문 식별 번호다.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북한 시골길을 달리는 흰색 구급차 한 대가 포착됐다. 보닛에는 적십자 마크, 측면 후측에는 세계보건기구(WHO) 로고가 붙었다. 라디에이터 그릴 한가운데에는 현대자동차 엠블럼이 선명하다.
2000년대 중반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스타렉스다. 북한 현지 도로를 담은 한 영상에서 포착했다. 대북 제재가 촘촘히 조여져 있어 한국산 완성차는 물론 서방에서 제조한 차량이 북한으로 반입되는 경로는 사실상 차단돼 있다.
그런데도 스타렉스뿐만 아니라 버스와 트럭 등 수 백여대의 현대차, 그리고 메르세데스-벤츠와 렉서스 등 초고가의 해외 브랜드 차량들이 버젓이 북한 땅을 누비고 있다. 과연 어떤 경로로 들어간 것일까.
국산차 대부분의 반입 경로는 개성공단이다. 북한은 2016년 2월 개성공단을 전면 폐쇄한 이후에도 남측 기업이 두고 온 버스를 개성 시내버스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TV가 2022년 7월 내보낸 개성 시내 보도 영상 속 파란색 버스가 대표적이다.
북한은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을 일방적으로 폭파한 이후에도 개성공단 통근용으로 투입한 현대차 에어로시티 버스를 되돌려 주지 않았다. 그리고 엠블럼과 한반도기 표식을 지우고 개성을 넘어 평양 고급 호텔 주차장과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원산 시내까지 무단으로 운행하고 있다.
남북 경협이 활발하던 시기 한국 차량은 정부 승인 아래 합법적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에 쓰인 차량들이다. 당시 반출 차량은 관세 통계상 '수출'로 잡혔고 고장 나거나 낡아 남측으로 돌아오면 '수입'으로 분류됐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무역 통계에 한국이 북한에서 '수입'한 차량이 778대로 집계된 배경이다. 앞서 1998년 10월에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501마리와 함께 현대정공의 4륜구동 SUV 갤로퍼 50대를 북한에 공식 기증하기도 했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2024년 압록강 범람으로 홍수)피해를 입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및 의주군 일대를 렉서스 LX를 타고 돌아 보고 있다. (오토헤럴드 DB)
영상에서 캡처한 스타렉스는 인도적 의료 지원 경로를 탔을 가능성이 높다. 2007년 유엔(UN) 발표에 따르면 한국 정부 자금 2000만 달러(약 270억 원)가 투입된 WHO 대북 보건의료 프로젝트를 통해 구급차 35대를 북한에 보냈다.
당시 장비와 구급차는 한국이 현물로 직접 지원하거나 국제기구 입찰을 통해 특장 개조된 국산 모델이 조달됐다.
이후에도 구급차 반입은 이어졌다. 유니세프(UNICEF) 북한사무소는 2019년 9월 9개 군 병원의 산모와 신생아 이송을 위해 구급차 9대를 북한 보건성에 인도했고 국경없는의사회(MSF) 역시 2020년 1월 제재 면제를 승인받아 결핵 치료용 구급차를 북한으로 보냈다.
북한에는 국산 승합차나 트럭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소떼을 몰고 방북했을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한 현대차 다이너스티(Dynasty)도 평안북도 향산군에 위치한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김정일)에 전시돼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은 최고 수준의 방탄·방폭 개조차인 메르세데스-마이바흐 S650 풀만 가드, S680 4MATIC, GLS 600 SUV 등을 이용하고 있다. 모두 대북 반출이 엄격하게 금지된 초럭셔리 차다. 러시아제 최고급 리무진 '아우루스 세나트(Aurus Senat)'도 김정은 위원장의 차다.
렉서스 LX, 토요타 랜드크루저와 하이랜더 시리즈, 포드 트랜짓과 벤츠 스프린터 등도 경호 및 기동 의전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차량들은 유럽에서 출항한 뒤 극동 러시아, 일본 중고차 시장, 중국 다롄이나 동남아 항구를 거쳐 선박 간 환적(STS)이나 유령 회사 세탁을 통해 밀반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렉스가 어떤 개별 지원 사업으로 들어갔는지 특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엄격한 대북 제재 속에서도 개성공단 무단 사용과 국제기구 인도적 지원을 거친 국산 완성차들이 여전히 북한 도로를 달리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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