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산업에서 오랫동안 통용되던 신차 개발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자동차 산업에서 오랫동안 통용되던 신차 개발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완전변경 모델을 출시한 뒤 2~3년이 지나면 디자인과 일부 상품성을 개선한 부분변경 모델을 선보이고, 다시 몇 년 뒤 차세대 모델로 교체하는 방식이다. 자동차 한 세대의 수명을 5~6년 안팎으로 유지하던 이러한 공식은 이제 중국에서 시작된 신차 개발 속도 경쟁 앞에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중국 전기차 업체들은 이미 2년 안팎의 신차 개발 기간을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기존 완성차 업체들이 신차 개발에 4~5년을 투입하는 동안 중국의 신흥 업체들은 개발과 검증, 생산 준비를 병행하면서 시장 대응 속도를 높여 왔다. 일부 업체들은 AI와 디지털 개발 기술을 활용해 개발 기간을 18개월 수준까지 단축하는 데 도전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속도는 중국 자동차 시장의 특수한 경쟁 환경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수많은 전기차 브랜드가 가격과 기술, 상품성을 앞세워 경쟁하면서 신차를 얼마나 빠르게 내놓느냐가 생존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중국에서 시작된 변화는 미국과 유럽의 전통적인 완성차 업체들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 전기차 업체들은 이미 2년 안팎의 신차 개발 기간을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있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이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26 파리모터쇼'를 취재하면서도 이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 르노의 신차 개발 전략은 유럽 자동차 산업이 중국발 속도 경쟁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르노는 소형 전기차 '트윙고 E-Tech 일렉트릭'을 불과 21개월 만에 개발했다. 이전 세대 차량 개발에 약 4년이 걸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개발 기간을 절반 이상 줄인 셈이다. 프랑스에서 초기 디자인을 완성하고 중국 상하이의 개발 조직을 활용해 엔지니어링을 진행한 뒤 슬로베니아 공장에서 생산하는 방식으로 개발 효율을 높였다.
더 주목할 부분은 르노가 이러한 개발 방식을 향후 신차의 표준으로 삼겠다는 방침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르노는 상하이에 설립한 첨단중국개발센터(ACDC)를 통해 중국의 빠른 의사결정과 부품 공급망, 개발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차기 다치아 소형 전기차의 경우 설계 확정 이후 개발 기간을 16개월까지 줄인다는 계획도 내놨다.
독일 폭스바겐그룹 역시 중국 샤오펑과 협력해 개발한 전기 SUV 'ID. 유닉스 08(ID. UNYX 08)'을 약 24개월 만에 양산 단계로 끌어올렸다. 중국 현지에서 개발한 새로운 전자 아키텍처 역시 기존보다 짧은 일정으로 개발했다. 중국 기업의 기술과 공급망뿐 아니라 신차 개발 방식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프랑스 르노의 신차 개발 전략은 유럽 자동차 산업이 중국발 속도 경쟁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미국 완성차 업체들도 개발 기간 단축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는 AI와 가상 엔지니어링 기술을 활용해 신차 개발 기간을 약 2년 수준으로 줄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실제 시제품을 반복 제작하던 과정을 디지털 환경의 설계와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하고, 엔지니어링과 생산 준비를 동시에 진행해 개발 효율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단순히 개발 인력을 늘리거나 업무 속도를 높이는 데 있지 않다. AI를 활용하면 공기역학과 차체 구조, 배터리 성능 등 수많은 설계 조건을 짧은 시간에 분석할 수 있다. 개발 초기부터 여러 부서가 동시에 작업하고 가상환경에서 문제점을 검증하면 실제 시제품 제작과 수정에 필요한 시간도 줄어든다.
신차 개발 기간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면 자동차 산업의 제품 수명주기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지금까지 부분변경 모델은 완전변경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낡아진 디자인을 개선하고 새로운 편의사양을 추가해 판매 경쟁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차를 2년 만에 개발할 수 있다면 굳이 부분변경 모델을 거쳐야 할 이유도 줄어들 수 있다.
특히 전기차와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더욱 빠르게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공용 플랫폼과 모듈화된 부품을 활용하면 새로운 차종을 개발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주요 디지털 기능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개선할 수 있다. 과거 부분변경 모델을 통해 추가하던 일부 기능을 차량 판매 이후에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신차 개발 기간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면 자동차 산업의 제품 수명주기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소비자 입장에서도 변화는 적지 않다. 지금까지는 신차 출시 후 3~4년이 지나면 부분변경 모델을 기다리고, 이후 완전변경 시점에 맞춰 구매를 결정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신차 교체 주기가 짧아지면 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차량이 구형 모델로 분류되는 상황도 빈번해질 수 있다.
다만 완성차 업체 역시 빠른 신차 출시가 반드시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개발 기간을 단축하더라도 충돌 안전성과 내구성, 배터리 신뢰성, 생산 품질에 대한 검증은 생략할 수 없다. 지나치게 짧아진 개발 일정이 충분한 시험과 검증을 압박한다면 출시 이후 품질 문제와 리콜 증가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생산설비 투자와 부품 공급망 운영, 기존 모델의 재고 관리 부담도 고려해야 한다. 소비자에게는 잦은 신차 출시가 중고차 잔존가치 하락과 제품의 빠른 노후화로 이어질 수 있다. 개발 속도를 높이는 것과 자동차의 가치를 오래 유지하는 것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시작된 2년 신차 개발 경쟁은 이제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이제 자동차 산업의 경쟁 기준은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얼마나 완성도 높은 신차를 개발하느냐가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높은 완성도를 유지하면서 얼마나 빠르게 시장에 내놓고, 판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개선할 수 있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할 전망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2년 신차 개발 경쟁은 이제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자동차 개발 방식을 바꾸면서 완전변경과 부분변경으로 구분하던 익숙한 제품 주기 역시 재편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머지않아 자동차 시장에서 '부분변경 모델'이라는 표현보다 '새로운 세대'와 '지속적인 업데이트'라는 말이 더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김훈기 기자/hoon14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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